휘(諱)는 성일(誠一)이요, 자(字)는 사순(士純)으로 본관(本貫)은 의성(義城)이다.
학봉선생은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아 선조(宣祖)원년(1568)에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弘文館) 부제학(副提學),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 등을 역임하였다. 임란시 경상도 초유사(招諭使)에 임명되어 민중의 궐기를 호소하는 초유문을 지어 각 고을에 보내 의병의 궐기와 지원을 극력 종용하였다.
특히 관병과 의병을 잘 조화하여 임진왜란의 삼대첩의 하나인 진주대첩을 거두었다. 이듬해 왜적과 사력을 다한 독전 중 병을 얻어 56세에 진주성에서 순국하였다. 뒤에 임천서원(臨川書院)에 제향되고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증직되었으며 문충공(文忠公)의 시호(諡號)를 받았다.
퇴계선생의 적전고제(嫡傳高弟)로서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 영남학파의 중추적 역할을 하였으며, 그 학통은 경당(敬堂) 장흥효(張興孝)를 거쳐 석계(石溪) (이시명)李時明,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 밀암(密庵) 이재(李裁),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손재(損齋) 남한조(南漢朝), 정재(定齊) 류치명(柳致明),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 : 鶴峯先生의 11代孫)에 이르기 까지 면면이 이어지고 있으며 저술로는 해사록(海槎錄), 상례고증(喪禮考證), 경연일기(經筵日記) 등과 문집(文集) 16권이 전해오고 있다. 안동의 호계서원(虎溪書院), 사빈서원(泗濱書院), 임천서원(臨川書院), 영양의 영산서원(英山書院), 의성의 빙계서원(氷溪書院), 하동의 영계서원(永溪書院), 청송의 송학서원(松鶴書院), 나주의 경현서원(景賢書院), 진주의 경림서원(慶林書院)등에 제향되었다.
학봉 종택은 口자형 정침을 비롯하여 사당(祠堂), 풍뢰헌(風雷軒), 유물을 보관한 운장각(雲章閣), 학봉기념관(鶴峯紀念館), 문간채 등 100여칸의 건물이 고색창연하게 위치하고 있다. 특히 운장각에는 경연일기(經筵日記), 해사록(海槎錄) 등 학봉 친필 원고와 사기(史記),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교서(敎書), 유서류(諭書類) 등의 고문서 503점이 보물로 지정되어 보관되어 있다. 현재의 집터인 금계(金溪)는 이곳 사람들이 '검제(黔提)'라 부르며, 조선 전기부터 천년동안 결코 그릇된 일이 없을 명당중의 명당(천년불패의 땅)으로 손꼽히던 곳이다. 학봉선생께서 마흔다섯이 되던 1582년에 2,000여평의 터에 집을 지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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