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林下筆記에 있는 학봉선조에 대한자료 발췌 옮김

김제덕홈페이지
 

임하필기(林下筆記)   이유원(李裕元) 


 


인일편(人日編)  


 


성의(誠意)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이 칼을 자제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말하기를, “너희들은 이 칼로의리(義利)의 관건(關鍵)을 끊어서 취할 것인지 버릴 것인지를 구별하도록 하라.” 하였다.





처세(處世)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은 고을의 집강(執綱)을 만나면 비록 연소한 자라 하더라도 반드시 예를 표하였다.





경신(敬身)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이 어슬렁어슬렁 들어오는 문인을 보고 꾸짖어 말하기를, “고어(古語)에 이르기를, ‘제1보(步)를 걸으면 마음이 제1보에 있고, 제2보를 걸으면 마음이 제2보에 있다.’ 하였으니, 이것을 몰라서는 안 된다.” 하였다.





신도(臣道)

○ 선조 때에 상이 경연에서 묻기를, “근래에 염치(廉恥)가 완전히 없어졌는데, 무엇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인가?” 하니, 장령 김성일(金誠一)이 대답하기를, “대신(大臣)으로서도 남의 뇌물을 받은 자가 있으니, 염치가 없어진 것은 괴이할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당시 정승으로 있던 노수신(盧守愼)이 수석(首席)에 있다가 나가서 땅에 엎드려 아뢰기를, “김성일의 말이 옳습니다. 신의 친척이 북방의 변장(邊將)이 되었는데, 신에게 늙은 어머니가 있다고 하여 자그마한 초구(貂裘)를 보내왔길래 신이 받아서 어머니에게 주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간(臺諫)은 직언(直言)을 하고 대신(大臣)은 과실을 인정하였으니, 둘 다 잘했다고 할 수 있다. 신료들이 서로 나무라고 독려하는 것을 지금처럼 해야 나랏일을 잘 다스릴 수 있다.” 하였다. 노수신 역시 김성일에게 후하게 사례하고, 그것을 불쾌하게 여기지 않았다.





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 


 


어버이의 나이가 70세가 넘으면 사신으로 나가지 않다


 


예전에는 북경에 가는 사신에게 나이 70세가 넘은 부모가 있으면 일찍이 상소를 진달하여 면하게 해 주기를 청하는 규례가 있었다. 후에 김성일(金誠一)이 서장관(書狀官)에 차임되었는데, 그 아비 김진(金璡)의 나이가 이미 78세나 되었다. 김성일이 규례대로 진달하여 면하고자 그 아비에게 급히 서신을 보내어 여쭈니, 그 아비가 답하기를, “내가 비록 연로하지만 지금 다행히 아픈 데가 없다. 너는 이미 임금에게 몸을 맡겼으니 사사로운 일을 돌아보아서는 안 된다. 나는 염려하지 말고 속히 임금의 명에 응하도록 하라.” 하니, 김성일이 마침내 감히 사양할 수 없었다. 사람들이 쉽지 않은 일이라 여겼다.





시장(諡狀)이 없이 시호를 내린 일의 시초


 


선조 6년(1573)에 대사헌 노진(盧禛)과 사간 김성일(金誠一)이 아뢰기를, “증 영의정 이황(李滉)은 도덕의 성대함이 마치 해와 별과 같으니 속히 시호를 내려서 세도(世道)를 권면하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행장(行狀)이 없다 하여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경연관 이이(李珥)가 아뢰기를, “옛날에 황간(黃榦)은 주자(朱子)의 수제자였음에도 스승이 죽은 뒤 20년이 지나서야 행장을 지을 수 있었으며, 이천(伊川)의 경우에는 그의 문인의 고제(高弟)들이 끝내 감히 이를 위한 붓을 잡지 못하였으니, 그 어려움이 실로 이와 같았습니다. 그런데 유독 이황의 문인이라 하여 어찌 이를 용이하게 지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대현(大賢)을 대우함에 있어서 상규(常規)에 얽매일 수는 없습니다. 이황으로 말하면 그 행적이 사람들의 이목에 분명한데 행장이 있고 없는 것이 무슨 보탬이 되고 안 되고 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문순(文純)으로 시호를 정하였는데 ‘도와 덕이 있고 견문이 넓은 것[道德博聞]’을 문(文)이라 하고 ‘중정하고 정수한 것[中正精粹]’을 순(純)이라 하는바, 유현(儒賢)에 대하여 그 시장을 기다리지 않고 시호를 내린 것이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전모편(典謨編) 


 


법령(法令) 


 


《주례》에 이르기를, “조사(朝士)는 외조(外朝)의 정법(政法)을 세워 다스리는 일을 관장한다. 좌측에 아홉 그루의 극목(棘木)을 심으니, 경대부의 자리이고, 군사(群士)가 그 뒤에 있으며, 우측에 아홉 그루의 극목을 심으니, 공(公)ㆍ후(侯)ㆍ백(伯)ㆍ자(子)의 자리이고, 군리(群吏)가 그 뒤에 있다. 전면에 세 그루의 괴목(槐木)을 심으니, 삼공(三公)의 자리이고, 주장(州長)과 백성의 대표자가 그 뒤에 있다. 좌변에 가석(嘉石)을 설치하니, 불순한 백성을 감화시키고, 우변에 폐석(肺石)을 설치하니, 불쌍한 백성의 하소연을 상달(上達)한다. 무리를 이끌고 채찍을 잡고서 외조를 순행하며, 행인을 호령하여 물리치고 태만하거나 불경(不敬)하거나 정해진 위치를 벗어나 모여서 잡담하는 것 등을 금지한다.” 하였다.





○ 선조조에 하원군(河原君) 이정(李珵)이 왕실의 지친(至親)으로서 여자와 술에 제멋대로 놀아나 민간을 침해하자, 장령 김성일(金誠一)이 그 집의 종을 체포하여 결박해서 엄중한 형벌을 가하였다. 이에 궁가(宮家)가 원망하고 화를 냈지만 감히 말하지 못했다.





시총(詩塚) 


 


임진왜란 때에 생원 정의번(鄭宜蕃)이 아버지 정세아(鄭世雅)와 함께 의병을 일으켜서 왜적을 토벌하였는데, 말이 내닫는 바람에 정세아가 말에서 떨어지자 정의번이 자기 말을 아버지에게 드리고는 적에게 달려들어 싸우다가 죽었다. 이에 감사 김성일(金誠一)이 그 시체를 찾다가 찾아내지 못하고 대신 만사(輓詞)를 묻어 장사를 지내 주고는 이를 시총이라고 불렀다. 





이유원(李裕元)1814년(순조 14)∼1888년(고종 25).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경춘(京春), 호는 귤산(橘山)·묵농(默農).

이조판서 계조(啓朝)의 아들.

1841년(헌종 7) 정시문과에 급제, 예문관검열·규장각대교를 거쳐 1845년 동지사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와 의주부윤·함경도관찰사를 지냈다. 고종 초에 좌의정에까지 올랐으나 흥선대원군과 반목하여 1865년(고종 2)에 수원유수로 좌천되었다.

1873년 흥선대원군이 실각하자 곧 영의정이 되었고, 영중추부사로 서임되었다.

영중추부사 《대전회통》 편찬의 총재관이 되었다. 당색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