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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존심이 곧 목숨이거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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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성김씨 학봉 김성일종택 -자존심이 곧 목숨이거늘-


안동 금계마을

선대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는 운장각에는 종 15,000점이 유물이 전시되어 있고. 후손중 교장만 30여명으로 선비집안의 후손이 진출할 가장 원만한 직업을 선생으로 보았다


학봉 김성일
"차라리 부숴지는 옥이 될지언정 구차하게 기왓장으로 남아서는 안 된다"는 자신의 신념을 위해 목숨을 건 인물이었는데
조선왕조실록에 1573년 사간원 정언일 때 선조가 경연장에서 "나는 전대의 어느 임금에게 비할 수 있느냐"고 하문하니 학봉은 "요순도 될 수 있고 걸주도 될 수 있습니다 이유는 전하는 타고난 자품이 고명하니 요순같은 성군이 되는 것이 어렵지 않으나, 스스로 성인인체 하고 간언을 거절하니 걸주가 망한 까닭이다" 라고 답하여 임금의 안색이 변하했는데 서애가 " 요순은 임금을 인도하는 말이고 걸주는 경계하는 말이니 모두 임금을 사랑하는 말이"라고 하여 화를 풀고 술을내어 경연을 마쳤다고 적고있다.
임란전 일본에 통신사로 갔을 때 일본인들에게 보여준 조선 선비로서의 자존심과 격조있는 태도는 오늘날 까지 영남과 안동에 전해오고 있으며 "풍신수길은 그 눈이 쥐와 같으니 염려할바 없다고" 하여 상황을 오판하게 했다고 체포하러 내려오는 금부도사를 기다릴 것 없다며 서울로 가던 도중에 충청도 직산에서 경상도초유사를 임명받아 영남에서 왜군들과 싸우다 진주대첩을 이끌고 진주공관에서 과로로 별세했다.
1930년 중앙선 설계시 학봉 묘소가 있는 안동시 와룡면 이화동 가수천을 관통하게 되어 있어 묘소의 내룡(來龍)이 끊어지게 되어 엄청난 불경이라고 제자들과 후손을 포함한 유림 수백명이 총독부에 진정서를 내자 터널을 다섯 개나 뚫어 묘소를 우회하도록 설계를 변경하할 정도로 학봉집안의 권위과 명성은 대단한 것이었다
학봉은 호남지역과 인연이 많은데 광주 고경명 집안이 전쟁에 나가면서 마지막 남길 핏줄을 의탁한 곳이 학봉 집안이었고 나주목사 재임시(1584) 나주 선비들과 나주나씨인 나사침의 적극적 협조로 나주 최초의 서원인 대곡서원(후일 경현서원으로 개명)을 세워 영남의 퇴계의 철학이 전라도에 전해져 호남의 가사문학과 만나는 계기가 된다

11대 종순 김흥락의 치욕이 독립운동의 불씨
학봉(김성일)의 11대 종손 김홍락의 제자들이 항일독립운동에 참여해 정부에서 훈장을 받은 사람이 60여명이요 안동 일대에 거주하는 의성김씨 내앞(川前)문중에서 훈장을 받은 사람 27명중 학봉의 후손만 11명이다
김홍락의 권위는 대단하여 1890년 민란의 무마를 의뢰받아 향청에 좌정하여 "무릇 민정은 순하면 따르고 역하면 뿌리치는 법이다 모든 폐정을 고치게 할 터이니 그대들은 물러가서 기다리라"는 말에 나으리가 우리를 속이겠느냐면 해산할 정도였는데,
또한 김홍락의 사촌인 의병포대장이 안동시 북후면 웅천에서 일본군에게 패한후 김홍락의 안방 다락에 숨어있다 1896년 7월22일 왜경에게 발각되자 왜경들은 김홍락과 동생 김승락 김진의 김익모 등 의병할동을 했던 집안어른 10여명을 포박하여 꿇어 앉히고 쓸 만한 불건은 가져가고 나머지를 부수는 등으로 수라장을 만들후 김희락과 김진을 압송되었는데 김희락은 외경의 위협에 굴하지 않고 지켜보던 가족들에게 내가 죽거든 자식들에게 원수를 갚도록 가르치라고 항거하다 총격에 숨졌는데 김흥락의 무릎을 꿇었던 일은 유림전체의 치욕이요 가문의 치욕이 되어 유림과 후손들이 독립운동에 투신한 계기가 된 것이다.

김용환의 파락호 인생
김흥락의 손자 김용환(학봉의 13대 종손)은 하늘 같은 할아버지가 치욕을 당하는 것을 목격한 것은 10세때였는데 노름으로 종가의 전재산인 전답 700두락(18만평)은 물론 종가까지 팔아 넘겨 후손들이 추렴하여 다시 사 주어도 팔아먹기를 3회나 하였으며, 무남독녀 외동딸인 김후웅이 청송 마평서씨 가문에 출가 할 때 농값으로 보낸 돈까지 탕진하여 흥선대원군, 형평사운동의 투사였던 김남수 와 함께 한국의 3대 파락호로 손꼽히다가 1946에 타계 하였다.
그후 그의 독립운동을 증거하는 자료들이 발견되어 195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받았고 이때 아버지에 대한 감회를 "우리아배 참봉 나으리" 라는 서간문에
" ...그럭저럭 나이 차서 십육세에 시집가니 청송 마평서씨문에 혼인은 하였으나 신행날 받았어도 갈 수 없은 딱한 사정 신행때 농 사오라 시댁에서 맡긴돈 그돈마저 가져가서 어디에서 쓰셨는지? 우리바래 기다리며 신행 날 늦추다가 큰어매 쓰던 헌농 신행발에 싣고가니 주위에서 쑥덕쑥던 그로부터 시집살이 주눅들어 안절부절 끝내는 귀신 붙어왔다 하여 강변 모래밭에 꺼내다가 부수어 불태우니 오동나무 삼층장이 불길은 왜 그리도 높던지 새색시 오만간장 그 광경 어떠할고, 이 모든 것 우리아배 원망하며 별난시집 사느라고 오만간장 녹였더니 오늘에야 알고보니 이 모든 것 저 모든 것 독립군 자금 위해 그 많던 천석 재산 다 바쳐도 모자라서 하나뿐인 외동딸 시댁에서 보낸 농값 그것마저 바쳤구나" 리고 적었는데 죽으면서도 가족들까지 속이면서 철저한 위장으로 재산을 독립자금에 바친 것이다

양자로 종손잇기 작전
학봉집안이 손이 귀하여 김용환도 양자로 들어왔는데 아들이 없어 1945년 문중 회의에서 100여리 떨어진 지례의 김시인이 자질을 갖추었다고 판단하는데에 김용환이 결정적인 작용을 하였으나,
김시인의 생가에서는 위장이긴 하지만 노름으로 전재산이 거들난 상태에서 종손의 무거운 책무을 맏길 수 없다고 완강하게 청을 거절하니 이를 설득하기 위하여 문중 사람들이 100여리 떨어진 지례에다 집을 한채 얻어놓고 10여명이 조를 짜서 마당에 멍석을 깔아놓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설득과 간청을 반복하는 일을 기를 보종을 위하여 당연히 치러야 할 대가로 여겼고 7개월만인 1945년 10월 다 김시인은 29살의 나이에 처와 아들 둘과 함께 양자로 왔고 2001년 현재 85세이며 김시인의 처는 영양 주실마을의 한양조씨 집안에서 출가한 조필남으로 14대 종부인데 사돈지를 써 달라는 부탁이 줄을 이을 정도로 문장도 대단했지만 없는 살림에도 종가를 찾는 사람들을 따뜻하게 대하려고 애쓰고 ,호박 한덩이라도 들려서 빈손으로 보내는 법이 없었기에 종부를 만나본 지손들이 인간미에 감동하여 종가를 보종하는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고 한다
1993년에 대구시내 꽃가게의 꽃들이 바닥 났기에 모 신문기자가 조사해 보니 조씨 할머니가 작고하여 문상조화 때문이었다는 기사를 보고 대구 매일신문에서 종부시리즈를 기획 연재 했다고 한다

문중원의 종부에게 올리는 신년세배
정월 초하루 학봉의 후손중 연장자 100여명이 종가사당에서 차례를 지낸후 종가 대청에서 종부 한사람만을 상대로 큰절을 하는 풍습이 내려오며 문중의 대소사의 결정에도 문회에서 이야기가 엉뚱한 방향으로 간다는 소식을 종부에게 전하면 종부가 몇몇 사람을 불러 의견을 개진하고 이 말을 전하면 종부의 의견대로 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종손 김시인씨와 종부 조필남씨는 슬하에 3남3녀를 두었는데 차종손인 장남 김종길(60세 삼보컴퓨터 사장및 나래이동통신 두루넷사장 역임후 현재 삼보컴퓨터 부회장) 차남김종필(58) 감사원 부이사관 3남 김종성 LG전자 상무 큰딸은 대구 장씨 집안으로 둘째딸은 원주변씨 종가로 출가하여 교편을 잡고 있고 셋째딸은 영양남씨 집안으로 출가했다


기업 사장중 최고의 사장으로뽑힌 김종길(15대 종손이 됨)
성공시대 TV프로에 출연한 적도 있고 동탑산업훈장과 올해의 정보통신인상을 수상하는 등으로 많은 신문과 잡지에 소개된 유명인사인데 종손이 될 사람으로 첨단사업을 하게되니 갓을 쓴 인터넷 사업가라고 표현 하더라고 하면서 종손으로 성장하다보니 항상 사람들과 함께 하는 훈련을 받았기에 직원들과 무난한 인간관계를 가질 수 있었는데 종손으로 한편으로는 우대를 받았으나 한편으로는 학봉집안이란느 공동체를 책임져야 한다는 책임감을 의식하면서 살다보니 리더십을 발휘하는 훈련이 되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학봉 후손들의 종가 돌보기
종길씨가 대학 입학당시 등록금 내기가 어려웠을 때 후손들이 종손을 도와야 한다면서 300~400가구에서 조금씩 돈을 거두는 것이 보종계입니다. 또한 보종의식이 강해서 종갓집 농사도 대신 지어주고 겨울의 땔감을 해주며 명절과 제사 때에는 종갓집 잔디로 베어주고 김장 때문 채소까지 주는 등 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하여 아무리 바빠도 직접 커피를 타서 대접한다고 하며 부인인 이점숙 여사는 집안 어른들의 결정으로 얼굴도 보지 못하고 결혼한 퇴계 종가의 종녀로 우리가 생활은 서울에서 하지만 한달중 절반은 안동에서 생활하고 있는데 일일 평균 50여명의 손님을 직접 접대 한다고 한다
종길씨는 딸만 넷이어서 양자를 들였는데 차남의 아들이 오는 것이 순서이고 둘째는 삼남이 아들을 양자 들여야 하는데 삼남의 아들을 양자로 맞은 것은 번거롭기도 하거니와 장남과 차남은 태어난후 양자로 왔으나 삼남은 검재의 종가에서 났으니 의미가 있다는 문중어른들의 판단이라고 한다.
손님의 규모에 대한 질문에 영남 일대 종가에서 우리집이 손님이 가장 많을 것이라고 하며 100년전 11대 서산선생 장례식의 조문객이 4,000여명이었고, 후손집에 분산해 숙식을 제공했다고 하고 1987 운장각 준공식때와 1955년 서산선생과 조부의 독립훈장 추서를 사당에 고유할 때 약 1천명씩의 손님이 모였으며 문중행사시도 1,000여명은 모이며 60년대 까지만 하더라도 사랑채에 과객들이 평균 10~15명이 머물고 있었는데 70년대에 도로가 뚫리면서 과객들이 줄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