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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년 전의 동서화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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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백 년 전의 동서화합




임진왜란 때의 일입니다.
호남 의병대장이던 고경명(霽峯 高敬命)이 아들 셋을 불러 말합니다.
“첫째와 둘째는 나와 함께 전쟁터에 나가야 한다.
셋째 용후(用厚)는 난리를 피해서 가문을 이어야 한다.”
“난리를 피해 조선 팔도 어디로 가면 되겠습니까?”
“어머니를 모시고 경상도 안동 학봉(鶴峯 ) 김성일(金誠一) 선생 집으로 가거라.
그 집은 높은 의리가 있는 집이니 너희들을 죽게 내버려두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16세 소년 고용후는 50여 명을 데리고 전라도 광주를 떠나
경상도 산골로 가서 학봉의 장남 김집을 만나 부친의 말을 전합니다.
그때부터 두 집안이 함께 생활하게 됩니다.
피란중이라 산나물로 죽을 끓여 연명하면서도 가족처럼 지내는데,
고경명 의병대장과 아들이 금산 전투에서 전사했다는 소식을 받습니다.
학봉의 집안에서는 상주가 된 고용후를 예법에 맞게 성복시켜 줍니다.
학봉의 손자 김시권(金是權)이 고용후에게 말합니다.
“자네나 나나 난리를 당하고 집안에 상(喪)까지 당했지만,
학문에 힘쓰지 아니 하면 나중에 옷 입은 짐승이 될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하여 함께 공부를 하다가 전쟁이 끝나고 고용후는 광주로 돌아갑니다.
선조 38년(1605년) 과거 시험에서 두 사람은 동시에 급제를 합니다.
10여 년 후, 고용후는 안동 부사로 부임을 하여
학봉의 노부인과 장남 김집을 초청하여 잔치를 베풀고
“소생에게 오늘의 영광이 있는 것은 20여 년 전의 은혜 덕분입니다.
두 분의 은덕이 아니었더라면 어찌 오늘이 있겠습니까?”
하며 울면서 큰절을 올립니다.
그 후로도 같은 연배의 두 집안 사람들은 친형제처럼 지냈습니다.

그 시대의 생활상은 집안 추스리기에도 어려웠을 것입니다.
더욱이 전쟁 때의 생활은 상상이 가고도 남습니다.
천리길을 넘은 두 집안의 의리와 인정이 새삼 돋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