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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천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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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천서원은 이런 곳...(안동시 송현동)


임천서원은 1607년(선조 40)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김성일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618년(광해군 10)에 '임천'이라 사액되어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왔다.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08년에 복원하였다.

이 서원의 경내 건물로는 숭정사, 홍교당, 동재, 서재, 신문, 전사청 등이 있다. 숭정사는 정면 3칸 건물에 맞배지붕 양식이고 홍교당은 15칸에 팔작지붕이다. 동재와 서재는 각 4 칸이고 팔작지붕이다. 그리고 신문과 전사청은 4칸이며 맞배지붕이다. 사당인 숭정사에는 김성일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강당인 홍교당은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는데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 강론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동재와 서재는 유생들이 기거하면서 공부하는 곳이며 주소는 서원을 관리하는 고자가 사용하고 있다. 이 서원의 강당인 홍교당은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6호로 지정되어 있다.

김성일(1538~1593) 선생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의성이고 자는 사순이며 호는 학봉이다. 선생의 아버지는 진이다. 선생은 이황 선생의 문인인데 1556년(명종 11)에 아우 복일과 함께 도산의 이황 선생을 찾아 <서경>, <역학계몽>, <심경>, <대학의의> 등을 익혔으며, 1564년에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서 수학하였다. 그후 다시 도산에 돌아와 이황 선생에게서 수학하고, 그로부터 요순 이래 성현이 전한 심법을 적은 병명을 받았다. 1568년에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권지부정사가 되고, 이듬해 정자가 되었다. 이어서 검열, 대교 등을 거쳐 1572년 봉교가 되어 노산묘를 노릉(단종의 능)으로 봉축하고 사육신의 관작을 회복 시켜 그들의 후손을 녹용토록 진언하였으며, 군덕과 시폐를 논의하였다. 이듬해 전적과 형조, 예조의 좌랑을 거쳐 정언이 되었고, 이어서 홍문관수찬으로 지제교, 경연검토관, 춘추관기사관을 겸하였다. 1574년 부수찬을 거쳐 다시 정언이 되어 변장으로부터 초피덧저고리를 뇌물로 받은 우의정 노수신을 탄핵하였다. 이듬해 이조, 병조의 좌랑을 역임하고 사가독서를 하였다. 1577년 사은사 서정관으로 명나라에 파견되어 종계변무를 위해 노력하였으며, 돌아와 이듬해 홍문관 교리가 되고, 이어서 장령, 검상, 사인 등을 역임하였다.

1580년 함경도 순무어사로 함흥, 삼수, 길주, 종성 등을 살피고 돌아와, 변장으로서 직무에 충실한 혜산첨사 김수를 당상관에 승품하고, 영건만호, 우응장과 정견용, 김광옥 등을 선전관에 기용할 것을 건의하였다. 선생이 1583년 사간이 되고, 이어서 황해도 순무어사로 다녀와 군기관리를 소홀히 하고 창곡을 부실하게 한 황주목사 윤인함의 파직을 건의하였다. 이듬해 나주목사로 부임하여 민원의 처리에 노력하고, 오랫동안 끌어온 이 고을 임씨, 나씨간의 송사를 해결하는등 선정을 베풀었다. 또한, 금성산 기슭에 대곡서원을 세우고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 등을 제향하는 한편 선비들을 학문에 전념하게 하였다. 1586년 나주 사직단의 화재에 책임을 지고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와 <주자서절요>, <자성록>, <퇴계집> 등을 편찬, 간행하였다.

1588년 종부시첨정이 되고, 이어서 봉상시정, 경기추쇄경차관, 예빈시정, 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1590년 통신부사로 일본에 파견되었는데, 이듬해 돌아와 일본의 국정을 복명할 때 "왜가 반드시 침입할 것" 이라는 정사 황윤길과 달리 민심이 흉흉할 것을 우려하여 왜가 군사를 일으킬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고 상반된 견해를 밝혔다. 그 해 부호군에 이어 대사성이 되어 승정원부제조를 겸하였고, 홍문관 부제학을 역임하였다. 1592 년 형조참의를 거쳐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재직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일의 복명에 대한 책임으로 파직, 서울로 소환 중, 허물을 씻고 공을 세울 수 있는 기회를 줄 것을 간청하는 류성룡 등의 변호로 직산에서 경상우도초유사로 임명되어 다시 경상도로 향하였다. 의병장 곽재우를 도와 의병활동을 고무하는 한편, 함양, 산음, 단성, 삼가, 거창, 합천 등지를 돌며 의병을 규합하는 동시에 각 고을에 소모관을 보내어 의병을 모았다. 또한 관군과 의병 사이를 조화시켜 전투력을 강화하는데 노력하였다. 그 해 8월 경상좌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가 곧 우도관찰사로 다시 돌아와 의병규합, 군량미 확보에 전념하였다.

또한 진주목사 김시민으로 하여금 의병장들과 협력, 왜군의 침입으로부터 진주성을 보전하게 하였다 1593년 경상우도순찰사를 겸하여 도내 각 고을의 항왜전을 독려하다가 병으로 죽었다. 선생은 정치적으로 동인에 가담, 1590년 정여립의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옥사한 최영경의 신원을 위해 서인의 영수 정철을 규탄하였으며, 그 후 동인이 남인, 북인으로 갈릴 때 류성룡, 김우옹 등과 입장을 같이하여 남인을 이루었다.

또 학문적으로는 이황의 고제로서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 주이론을 계승하여 영남학파의 중추 구실을 하였으며, 학통은 장흥효-이현일-이재-이상정으로 이어 전해졌다. 또한 예학에도 밝아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서는 모든 예절을 가리에 따라 행하였으며 <두씨통전>, <구씨의절>, <향교례즙> 등을 참고하여 <상례고증>을 지었다. 1614년에 신도비가 세워지고, 안동의 호계서원, 사빈 서원, 영양의 영산서원, 의성의 빙계서원, 하동의 영계서원, 청송의 송학서원, 나주의 경현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해사록>, <상례고증>등이 있으며, 1649년(인조 27) 에 문집으로 <학봉집>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선생은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