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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성일은 충신이었다

우리 속담에 자손이 출세하면 붓으로 조상을 키운다’는 말이 있다. 조상숭배 의식이 남달리 강한 우리나라에서 출세한 자식이 조상의 업적을 부각시키는 문중(門中) 사학은 크게 탓할 일이 아닐 수도 있다.
문중 사학이라 함은 곧 문집(文集)에 의한 역사 기술을 의미한다. 문집은 선조가 남긴 글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생전의 업적을 기록한 자료집을 일컫는다. 문집은 관청에 의해 역사가 편찬되던 시대에 나름대로 긍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문집은 자료의 보고였으며 자료의 인멸을 막을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장치였다.
문집은 많은 폐해도 낳았다. 문집의 집필 동기가 가문을 빛내고 고인의 생애를 추모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점에서 당초부터 어느 정도의 곡필(曲筆)은 예상된 것이었다.



- 예컨대 가문의 유업을 기록한다는 당초 의도가 도외시된 채 고인의 일생에 대한 변명, 과대평가, 정적에 대한 왜곡된 비하가 주류를 이루었을 경우 이는 역사학의 해독이 될 수밖에 없다.
요즘처럼 국학이 비인기학문으로 전락해 외부의 재정 지원을 받기 어렵게 되자, 각 문중의 역할이 어느 때보다 활기를 띠고 있다. 문중에서 대학 등의 권위를 빌려 조상의 문집을 새로 간행하고, 그들의 사상과 행적을 기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무슨무슨 학, 무슨무슨 사상연구회가 생겨나고 거기에 연구 인력이 포진했다. 이들이 객관적 기록에 입각해 고인의 행적이나 사상을 정확히 기술한다면 바람직한 일이지만 현실을 돌아보면 그렇지만은 않다. 감탄하고 존경하기로 작정을 하고 낯뜨거운 미사여구만 늘어놓은 글이 적지않은 것이다.
이러한 문중 사학의 폐해가 여실히 드러난 것이 의성(義城) 김씨 문중의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의 경우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임진왜란의 전운이 감돌자 조선의 조정은 일본의 내부상황을 탐지하기 위해 첨지(僉知) 황윤길(黃允吉)을 정사(正使)로, 사성(司成) 김성일을 부사(副使)로 일본에 파견했다.

"국가대사 크게 떠들일 아니다"
그런데 이들이 귀국해 보고하는 자리에서 황윤길은 전운이 임박했다고 말했고, 김성일은 가히 걱정할 일이 못된다고 보고했다. 결국 김성일의 그릇된 보고가 전란의 참화를 불러일으켰으니, 김성일은 역적이라는 것이 종래 교과서의 일관된 논조였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과 많이 다르다. 당시의 정황을 좀더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 ‘선조(수정)실록’(24년 3월 1일 정유 조)과 ‘징비록(懲毖錄)’을 자세히 살펴보면 사건의 내막은 다음과 같다.

황윤길과 김성일이 일본에 도착한 것은 1590년 4월이었다. 그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를 만나 업무를 마치고 돌아올 즈음 일본측이 국서(國書)로 회신해야 하는데도 이를 내놓으려 하지 않자 김성일은 그것이 국례(國禮)에 어긋난다 하여 3일을 기다린 후 국서를 받아냈으며, 받은 국서가 무례하자 보름을 기다린 끝에 내용을 고쳐 이것을 갖고 이듬해인 1591년 조선으로 돌아 왔다.

귀국한 후 어전에서 황윤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안광이 빛나며 반드시 병화(兵禍)가 있을 것”이라 했고, 김성일은 “히데요시란 인물은 두려워할 인물이 족히 되지 못한다”고 왕에게 아뢰었다.

그 자리를 물러 나와 좌의정 유성룡(柳成龍)이 김성일에게 “그대가 황윤길과 다르게 말하는데, 만약 병화가 있게 되면 어찌 하려고 그러는가?” 하고 물으니, 김성일이 대답하기를 “저도 어찌 왜적이 쳐들어오지 않으리라고 단정했겠습니까? 다만 온 나라가 놀라고 의혹할까 두려워 그것을 풀어 주려고 그렇게 말했을 뿐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위의 문헌으로 미루어 보건대 일본군이 쳐들어오지 않으리라고 김성일이 어전에서 보고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의 발언은 결코 진심이 아니었다. 그는 더 깊은 데를 생각하고 있었다. 국가의 중요한 정책 결정 과정에서 김성일이 정직하게 문제를 제기하지 않은 것은 실수였으며, 그런 점에서 그에게 책임을 물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가 진실로 바랐던 것은 민심의 안정이었으며, 전쟁과 같은 국가 대사는 알 만한 사람끼리 알아서 처리할 일이지 여럿이 모여 크게 떠들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두 사람의 상반된 견해를 최종적으로 판단했어야 할 선조의 무능함에 어쩌면 더 큰 책임이 있는지도 모른다.


진심 알고 공직에 다시 임명



그러나 막상 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왜군이 쳐들어오지 않으리라고 보고한 김성일을 괘씸히 생각하여,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있던 그를 옥에 가두도록 명령했다. 그때 그의 진심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던 유성룡이 왕에게 간곡히 아뢰어 김성일은 하옥을 면할 수 있었다. 하옥 명령이 떨어졌을 때 김성일은 자신의 운명을 걱정하는 기색이 없이 오히려 경상감사 김수(金쉛)에게 적을 막을 방책을 일러주는 모습을 보여 하자용(河自溶) 같은 이는 “자기 죽는 것은 걱정하지 않고 오로지 나라 일만을 근심하니 이 사람이야말로 참다운 충신이다”라고 말했다.(‘징비록’ 상)



그후 김성일의 진심을 안 선조는 그의 잘못을 용서하고 그에게 경상도 초유사(招諭使·의병을 모으고 민심을 수습하는 직책)를 제수하여 왜병을 막는 데 힘쓰도록 당부했다.



김성일은 죽산(竹山)과 함양(咸陽) 등에서 격문을 돌리고 김면(金沔), 정인홍(鄭仁弘), 홍의장군 곽재우(郭再祐) 등의 도움을 받아 의병을 이끌고 진주성을 지키면서 군정(軍政)에 노심초사했으며, 역질에 걸린 백성들을 돌보다가 전염되어 진중에서 죽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사사로운 일을 말하지 않았고 그의 아들 혁이 함께 병중이었으나 한번도 돌보지 않았다.



훗날 같은 인물, 같은 사안을 놓고 두 사람이 어찌 그리 다른 보고를 했는가에 대하여 의혹을 떨칠 수 없었던 선조는 신임하던 동지사(同知事) 이항복(李恒福)에게 그 연유를 물었다.



- 이항복의 답변에 따르면, 어전에서 그런 논의가 있은 후 이항복은 김성일과 함께 궁궐안을 거닐면서 왜 일본이 쳐들어오지 않는다고 보고했느냐고 물었더니, 그가 답변하기를, “남쪽의 인심이 동요되는 것이 걱정스러웠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 이항복은 이런 연유를 선조에게 아뢰면서 김성일의 진심은 여럿이 모인 자리인지라 불필요하게 불안을 조성할 소지가 있어 사실과 다르게 말씀드린 것이라고 자초지종을 아뢰었다. 이항복의 말을 듣고 있던 좌중의 대사헌 홍진(洪進)은 김성일이 살았더라면 진주성이 함락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아뢰었고, 임석했던 사관(史官)은 김성일이야말로 진실로 유직(遺直·마음이 곧은 옛 사람의 기풍이 남아 있음)이라고 기록했다.(‘선조실록’ 28년 2월 6일 을유 조)





. 황윤길 후손이 죄인으로 단정



이와 같은 전말에도 불구하고 현대의 한국사학사에 들어오면서 김성일은 임진왜란이라는 참화를 유발한 역사의 죄인으로 기록됐다.



이러한 논지를 최초로 편 학자는 황윤길의 문중 후손이었던 황의돈(黃義敦)이었다. 일제시대에 중등학교 국사교과서를 편찬했고 해방 후에는 동국대에서 국사학을 연구한 한국사학의 1세대 학자인 그는 ‘신편 조선 역사’(이문당·1923)를 쓰면서 황윤길은 정직한 지사였던 반면 김성일은 죄인이었다고 단정해 기록했다.



한 역사적 인물의 행적은 그의 진심과 동기를 이해하는 데에서부터 비롯해야 하며, 그의 진심은 그가 마지막 생애를 어떻게 마쳤는가에 따라 평가되어야 한다. 김성일은 신중한 애국자요, 충신이었지 결코 의롭지 않게 거짓을 말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문중 사학의 희생자였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