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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사(精舍)는 안동시 풍산읍(豊山邑) 막곡리(幕谷里) 287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선조 20년(1587)에 학봉(鶴峯)선생이 건립한 정사이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와가 홑처마 팔작 지붕이다. 석문(石門)이란 정사 입구에 바위 돌이 마주 보고 서 있는데 골짜기가 휑하니 빈 것이 마치 문과 같다하여 이름지은 것이다.
정사에는 "석문정사"라는 현판과 시판(詩板) 및 송암(松巖) 권호문(權好文), 지산(芝山) 김팔원(金八元), 문봉(文峯) 정유일(鄭惟一)선생 등의 시판과 밀암(密庵) 이재(李裁)선생이 지은 "석문정사기문(石門精舍記文)"이 게판되어 있다.
석문정사는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34호(1985. 8. 5)로 지정되었다.



이 정자는 학봉(鶴峯)종택 내 동편에 위치하고 있다. 풍뢰헌(風雷軒)은 단곡(端谷) 김시추(金是樞) 공의 강학지소로 학문을 연구하고 후진양성을 위하여 세운 건물이다. 지은지 오래되어 퇴락한 것을 후손들이 극력주선으로 경인년(1990)에 중건하였다.
건축양식은 영남 북부지방의 일반적인 정자 양식으로 양편에 방이 각 한 칸씩 있으며 중앙과 전면 전체가 마루로 구성되어 있으며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팔작 지붕이다.
김시추 공의 자는 자첨이고 호는 단곡이다. 학봉선생의 장손으로 호양 권익창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선조 34년(1601)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광해군 13년(1601)에 영남 유생들이 모여 간신 이이첩 일당의 죄과를 추상같이 단죄하는 소를 올리는데 공을 소수로 추대하니 이이첨이 대간을 시켜 탄핵하여 일이 장차 불측하게 되어가려 하였으나, 공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연다라 제4소까지 올렸다. 인조 2년(1624)에 안기찰방(安奇察訪)이 되고 정묘년(1627)에 호란(胡亂)이 일어나니 의병대장에 추대하였다. 인조 8년(1630)에 의금부(義禁府) 경력(經歷)에 제수되었다.



이 정자는 봉화군(奉化郡) 법전면(法田面) 소천리(召川里) 졸내(拙川)에 위치하고 있다. 옥계(玉溪) 김명흠(金命欽) 공의 효행과 학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사림과 후손들에 의하여 건립되었다.
김명흠(1696-1773) 공의 자는 백해(伯諧)이고, 호는 옥계이다.
학봉(鶴峯) 선생의 5대손으로 김한기(金漢基) 공의 장남이다. 옥천(玉川) 조덕린(趙德隣)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하였다. 장사후에 묘소 밑에 여막을 짓고 3년동안 시묘살이를 하였다.
공이 죽은 후 고종 23년(1886) 공의 효행을 나라에서 상언하여 통훈대부(通訓大夫)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에 증직되었다.



이 정자는 안동시 서후면(西後面) 성곡리(城谷里) 150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유유헌(悠悠軒) 김진국(金鎭國) 공의 강학지소이다.
순조 30년(1830)에 지은 건물로서 일반적인 정자 양식으로 양편에 방이 각 한칸씩 있고 중앙과 전면 에 마루로 구성되어 있다. 정면 4칸, 측면 2칸에 팔작 지붕이다.
김진국(1775-1835) 공의 자는 덕함(德涵)이고 호는 유유헌이다. 학봉 선생의 10대손으로 김항수(金恒壽) 공의 맏아들이다. 천성이 준엄하고 인후하였다. 일찍이 학문에 전념하여 읽고 사색하고 침식을 잊었다. 순조 27년(1827)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일천(逸薦)으로 순조 31년(1831)에 정릉참봉(貞陵參奉)에 제수되었다.



이 정자는 봉화군(奉化郡) 춘양면(春陽面) 임기리(林基里)에 위치하고 있다. 엄라(嚴懶) 김성월(金聖鉞) 공이 안동 금계에서 봉화군 춘양면 임기리로 이거하여 만년에 미산(薇山)과 엄라(嚴懶)의 경승을 사랑하여 정자를 세웠다. 건립한지 오래되어 퇴락한 것을 무술년(戊戌年 1958)에 후손들에 의해 지은 건물이 지금의 건물이다.
김성월(1659-1745) 공의 자는 성로(聲魯)이고 호는 엄라이다. 학봉(鶴峯)선생의 5대손으로 종사랑(從士郞) 김후기(金厚基) 공의 맏아들이다. 학문이 출중하고 필법이 준수하여 금석(金石)에 새겨진 것이 많고, 세상에서 공의 글씨를 받으면 보화로 여기었다. 석문정 남쪽 바위에 새겨져 있는 석문(石門)두 글자도 공의 글씨이다. 영조 18년(1742)에 수직(壽職)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 용양위(龍衛) 부호군(副護軍)에 올랐다.



이 정자는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모계(某溪) 김홍락(金鴻洛) 공의 강학지소이다. 지금의 건물은 무진년(戊辰年, 1988)에 사림과 후손들에 의하여 지은 건물이다.
김홍락(1863-1943)의 자는 우경(羽卿)이고 호는 모계이다. 학봉 선생의 11대손으로 김진의(金鎭祥) 공의 맏아들이다.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 공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고종 31년(1894)에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시강(侍講)을 거쳐 비서감랑(秘書監郞)이 되어 통정계(通政階)에 올랐다. 경술년(1910)에 나라가 망하니 문을 닫고 글 읽기와 저술로 세월을 보냈다.



이 정자는 구미시(龜尾市) 선산읍(善山邑) 생곡리(生谷里)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곽(東郭) 김기찬(金驥燦) 공의 강학지소(講學之所)이다.
지금의 건물은 신미년(辛未年 1991)에 사림과 후손들에 의해 중건한 건물이다.
김기찬(1748-1812) 공의 자는 덕여(德汝)이고 호는 동곽이다. 학봉(鶴峯)선생의 8대손으로 김주훈(金柱勳) 공의 차자이다. 기우가 청수하고 성품이 관후하여 효우가 지극하여 향당에 신망이 두터웠다.
정조 1년(1777)에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弘文館) 정자(正字) 박사(博士), 전적(典籍)을 지내고,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을 거쳐 태천현감(泰川縣監), 이조정랑(吏曹正郞), 사헌부 장령(掌令)을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