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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염박지 세전 천년불패지지(閭閻撲地 世傳 千年不敗之地 : 마을이 가득하게 짜여 있으니 세상에 전하기를 천년이 지나도 무너지지 않는 땅)라 했다." 이렇듯 산자수명(山紫水明)한 길지에 터를 잡은 입향조는 학봉(鶴鳳)이다.

청환(淸宦), 충의(忠義), 석학(碩學)들이 줄을 이어 무수히 배출된 조선조(朝鮮朝)의 대표적인 유가(儒家)의 터전이 검제이다. 안동 시내에서 서쪽으로 풍산(豊山), 예천(醴泉)을 잇는 국도를 따라 5Km 쯤 가다보면 옛날 공민왕(恭愍王)의 전설이 깃들어 있는 솔밤다리(松夜橋)가 나온다. 여기서 북쪽으로 제방길을 따라 1Km쯤 지나 산천경계의, 경치에 홀리고 있노라면 만운촌(晩雲村)에 다다른다. 여기서 부터가 검제 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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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太白山)에서 정기를 모아 흘러내린 힘찬 산맥이 북쪽에 학가산(鶴駕山) 준봉이 솟아있고 쏟아지듯 허리를 굽히더니 다시 영산(靈山)인 천등산(天燈山)이 솟구치면서 문어발처럼 펴져 제 2봉인 가봉산을 만들어 작은 산봉우리를 이어가며 순하고 수려한 줄기가 남쪽을 향하여 펼쳐졌다. 활기가 넘치는 능선을 등지고 동서로 길게 뻗어 참새가 줄을 타고 앉아 있듯 적게는 다섯집, 많아야 10여집이 옹기종기 늘어서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그래서 소지명(小地名)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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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운(晩雲), 경광(鏡光), 어뜰(於坪), 효자문(孝子門), 금장골(金莊谷), 작장골(勺將谷), 미산(眉山), 텃골(基谷), 동무지(東地), 부루골(扶老谷), 복당(福堂), 번구(樊口), 뒷골(後谷), 단정(丹鄭), 사망(仕望), 알실(知谷), 가음(佳陰), 봄파리(春坡), 능골(陵谷), 조부실(造火谷), 덕거리(德巨里), 대골(大也谷), 재일(在日), 독실(瓮谷), 봉림(鳳林) 등 20여개 소촌이 모인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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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한 곳에 모여 있는 마을과는 색다른 정취를 느끼게 하는 고장이다. 이에 따라 예부터 "열두 검제는 들을 검제이지 눈으로 볼 검제는 아니다."라고 했듯이 한눈에 마을 전체를 보고 감상할 수는 없다. 이렇게 늘어선 마을 앞을 가로질러 비단폭을 펼쳐놓은 듯 수정같이 맑은 금계천(金溪川)이 흘러 풍수지리의 대지의 수리를 완벽하게 갖춰 놓은 뒤 멀리서 도도히 흐르는 낙동강(洛東江 : 潢水)과 서쪽의 청성산(靑城山) 아래에서 만나 합수하면서 절경을 창조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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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지방지(地方誌)로 가장 오래된 영가지(永嘉誌)는 이렇게 적고 있다. "속명을 (今音地), 또는 금계(金溪)라 한다. 안동부 서쪽 20리허에 있다. 옛부터 천년을 두고도 무너지지 않는 땅(千年不敗之地)이라 불렀다.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이 임하(臨河)로부터 와서 살게 되면서 마을이 풍요로와 졌다. 한 줄기 시내가 마을 가운데를 뚫고 흐르며 나이 많은 노인을 모시는 집이 많으니 주변(一鄕)에서 노인촌이라 부른다.(耆老比屋居之, 一鄕稱爲老人村)" 이렇듯 장수마을이기도한 이 고장은 복지촌으로 널리 알려져 부러움을 받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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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용암(庵) 김헌락(金獻洛)이 쓴 금계지(金溪誌)는 마을 이름의 유래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금계는 일명 금지(金池)라 한다. 구호를 금제(金堤)라 했는데 방언의 훈(訓)은 검(黔)이라 해서 속되게 부르기를 검제(黔提)라 했다. 혹은 이르기를 옛날에 시내가 나누어져 흘러 가운데로 열리면서 마을을 이루니 마치 거문고의 모양과 같아 금제(琴提)라 불렀다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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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날 의성김씨(義城金氏)가 번성하게 살게되니 금계(金溪)라 고쳤다. 부드러운 산에 둘러 쌓여 껴안은 듯 기색이 명미한 한줄기 시내가 가운데로 흐르니 여염박지 세전 천년불패지지(閭閻撲地 世傳 千年不敗之地 : 마을이 가득하게 짜여 있으니 세상에 전하기를 천년이 지나도 무너지지 않는 땅)라 했다." 이렇듯 산자수명(山紫水明)한 길지에 터를 잡은 입향조는 학봉(鶴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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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 휘(諱)는 성일(誠一)이요 자(字)는 사순(士純)으로 본관(本官)은 의성(義城)이고 문충공(文忠公)의 시호(諡號)를 받았으며 학봉은 호(號)이다. 의성군(義城君) 휘(諱) 석(錫) 시조(始祖)의 십구대손이며, 첨사공(詹事公) 휘 용비(龍庇) 선조의 십일대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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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성 김씨가 처음 안동부에 터를 잡게 된 것은 첨사공의 오대손인 전서공(典書公 : 金居斗)과 공의 아들 만호공(萬戶公 : 金) 부자이다. 전서공은 이성계(李成桂)의 역성혁명(易姓革命)으로 고려(高麗)가 망하고 조선조(朝鮮朝)가 개국되자 "나라가 바뀌었으니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邦之革矣 我安適歸)" 하고 아들 만호공과 함께 지금의 안동시 율세동, 일명 방적동(邦適洞)에 자리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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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만호공의 증손인 망계공(望溪公 : 金萬謹)이 임하현의 해주오씨(海州吳氏)와 혼인하여 처가 고장인 내앞(川前)으로 옮겨 새 터전을 마련하였다. 망계공의 손자 청계공(靑溪公 : 金璡)은 이곳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의 광범위한 지역에 자손만대의 큰 계획(爲子孫萬年大計)을 확립한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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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은 아들 오형제를 두었는데 장남 약봉공(藥峯公 : 金克一)은 문과에 급제하여 내자시정(內資寺正)을 역임하고 내앞에 터를 잡았으며, 차남 귀봉공(龜峯公 : 金守一)은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여 자여도(自如道) 찰방(察訪)을 지내고 일직현(一直懸) 구미(龜尾 : 뒤에 내앞으로 歸鄕)에 터를 잡고, 삼남 운암공(雲巖公 : 金明一)은 생원시에 합격하고 임하현 신덕(新德)에 자리를 잡았으며, 사남이 바로 학봉공으로 이곳 검제에 터전을 마련하였고, 오남 남악공(南嶽公 : 金復一)은 문과에 급제하고 창원부사(昌原府使)를 역임하고 예천현(醴泉懸)의 용문면(龍門面) 구계리(九溪里)에 터를 잡아 각각 분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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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봉공은 검제로 이거(移居)한 시기는 선조(宣祖) 15년(1582, 壬午) 7월이다. 공은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아 선조 원년(1568)에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이 홍문관 (弘文館) 부제학(副提學)에 이르렀고 선조 13년(1580, 庚辰)에 청계공이 별세함으로 친상을 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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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년상을 마친 공은 그해 나라에서 사간원(司諫院) 사간(司諫)과 이어 성균관(成均館) 사예(司藝)의 관직을 내리고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고 그해 처가(妻家)가 있는 검제로 옮겼던 것이다.
공은 어버이를 읽은 슬픔이 아직 가시지 않아 이곳에서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그로부터 5년 뒤 공이 50살이 되던 해인 선조 20년(1587, 丁亥)에 마을의 서쪽 끝 청성산(靑城山, 일명 星山) 절경의 중허리에 석문정사(石門精舍)를 건립하고 후진양성에 전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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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는 일화가 있다. 공은 송암(松巖) 권호문(權好文)과 학문을 논하며 두터운 교우로 사귀었는데 청성산이 송암공의 소유였다. 하루는 공이 이곳 절경의 산수를 보고 송암공에게 "이곳에다 정사를 지어 후진양성을 하였으면 좋겠다."고 하니 송암공이 선뜻 산 중허리를 잘라 "위쪽의 산을 줄터이니 정사를 짓도록 하오."라고 허락하여 석문정사를 짖게 되었다는 것이다.정사의 남쪽에 돌 두 개가 마주 보며 우뚝 서 있어 석문(石門)이라 이름하였는데 공의 5대손인 엄라옹(嚴懶翁 : 金聖鉞)이 마주보는 돌에 "石門"이란 두 글자를 새겨 지금까지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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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이 정사를 더욱 넓히고 후진양성에 전념하려던 선조 22년(1589, 己丑) 12월에 조정에서 일본의 보빙(報聘 : 友好로 他國이 訪問하였을 때의 答禮使節)을 논하자 적정(賊情)을 측량키 어려워 모두들 기피하였을 때 공에게 일본(日本) 통신부사(通信副使)로 차배(差配)하여 일본을 다녀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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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해인 선조(1590, 庚寅) 3월에 잠시 낙향하였다가 그로부터 2년 뒤인 선조 25년(1592, 壬辰)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도(慶尙道) 관찰사(觀察使)로 임명되어 진주대첩(晋州大捷)을 성공리에 마치고 아듬해 왜적을 맞아 사력을 다하여 전투를 독려하던 중 병을 얻어 진주공관에서 순국하니 향년이 56세였다. 뒤에 이조판서(吏曹判書)로 증직되고 문충공(文忠公)의 시호(諡號)를 받았다.

공이 검제로 이거(移居)한 지 사백이십여년, 그동안 많은 명현(名賢), 석학(碩學)들을 배출하여 대과(大科=文科) 출신자가 10명, 소과(小科=司馬試) 출신자가 25명, 은일(隱逸) 또는 음직(蔭職)이 25명, 항일(抗日)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가 12명에 이르고 있다. 이렇듯 학문과 애국 애족의 정신이 충만한 검제(金溪), 이 마을 출신들은 현재에도 전국 각지에서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눈부신 활약을 하고 있어 선대의 정신을 손색없이 잇고 있다.